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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벌 '동지'로 연루된 자의 삶

그냥 드는 생각

by 사회가 부도 2025. 3. 4.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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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연인이 페미니스트면 좋겠다는 사람을 만난 적 있다. 지금은 페미니스트보다 개저씨에 더 가깝고 최근 몇 년 동안은 젠더 이슈와 의도적으로 거리두기를 했다고 생각한 나는 그 사람의 슬픔과 외로움을 마냥 외면할 수 없어서 그와 사귀었다.

하지만 그는 사귄 지 2주 만에 퀴어, 특히 트랜스젠더 혐오가 담긴 게시물을 공유하며 본색을 드러냈다. 나는 섣불리 그를 혐오자로 몰아가지 않으며 트랜스 혐오를 지적했으나, 그는 "트젠 중에서도 여혐하는 사람이 있지 않느냐"며 내 지적을 외면했다.

나는 그 혐오와 외면을 목도하며 마치 내가 혐오를 당하고 외면당한 듯 아팠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활동을 그만둔 지금까지도 젠더 이슈에 깊이 연루되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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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회 문제에 대해 외면하는 게 쉬운 사람들이 있다. 아마 대부분은 그럴 것이다. 하지만 12.3 이후 누군가는 깨달았다. 소외된 사람들을 두고 나 혼자 앞으로 갈 수는 없다는 걸. 그걸 깨달은 사람들, 적게는 10대에서 많게는 30대, 대부분이 여성이거나 퀴어거나 둘 다인 이들은 남태령 대첩을 기점으로 소외된 현장이라면 어디든 '말벌아저씨'처럼 뛰어다녔다. 사람들은 이들을 '말벌 시민', 혹은 '말벌 동지'라고 불렀다. (이 글에서는 말벌 동지라고 하겠다.)

이들은 사측과 공권력으로부터 탄압받는 '꿀벌'들을 보호하기 위해 열심히 현장에 나타났다. 꿀벌들의 외로움을 마냥 외면할 수 없어서든, 이들을 외면해 온 스스로가 부끄러워서든 이들은 꿀벌들과 늘 함께 연대하고 있다. 심지어 경찰에게 연행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때 깨달았다. 말벌 동지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적극적으로 연루되기'라는 걸. 지난 겨울 윤석열 관저 앞에서 민주노총이 공권력에 의해 탄압받는 걸 목도한 이들은 민주노총 조합원은 아니지만 머리띠랑 조끼를 두르기 시작했다. 급기야 민주노총에서 누구나노조지회(이하 누구나지회)를 조직하자 이에 화답하듯 수백 명이 누구나지회에 가입했다. 민주노총에 적극적으로 연루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우리가 지혜복이다"를 외치며 A학교 성폭력 피해를 해결하다 부당하게 전보를 받은 지혜복 교사와 연루되었고, 광장에서 "민주동덕" 깃발이 외친 연대 요청에 적극적으로 화답하며 동덕여대에도 연루되었다. 이 연루의 흐름은 바다 건너 저 팔레스타인까지 이어져 집회 현장마다 팔레스타인 깃발을 보는 게 익숙한 현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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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연대하는 개인에 불과한 자신이 '말벌'로 싸잡히는 게, 나는 선량하고 평범한 시민이라고 말벌 동지들과 거리를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벌 동지들은 이미 지난 28일, 선량하고 평범한 시민이 누군지를 공권력이 정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이미 이들은 지혜복 교사와 적극적으로 연루되어버린 것이다.


연루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남이 저지른 범죄에 연관됨."

말벌 동지들은 우리가 '연루'되지 않으면 연대가 피상적인 선에서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지난 2월 재판에서 거통고 조선하청지회 조합원들은 지난 재판에서 모두 집행유예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민주노총 세종호텔지부 조합원들은 대법까지 갔음에도 패소했다. 그럼에도 말벌 동지들이 이들과 연대하는 이유는 이들의 부당함과 소외에 어떻게든 '연루'되기를 택했기 때문이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박정혜, 소현숙의 외로움에 함께 하기 위해 희망뚜벅이에 나섰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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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설날을 길거리에서 보내고 나서 나 역시 거통고와 세종호텔, 동덕여대와 함께 하고 있다. 거통고와 세종호텔 농성장에 나가 연대 발언을 하고 동덕여대 집회에 현장 안전 스태프를 하면서 나는 이들과 동지가 되었다. 남태령에서, 경복궁에서 이주노동자 2세인 위아더해군 님의 발언을 듣고 "내 조상인 태조 이성계는 원나라인이었다"고 말하며 이주노동자들과 연루되기를 택했다.

이렇게 한다고 내가 당사자 문제와 밀착할 수 없고 당사자로서 겪는 어려움에 다 공감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오만이지.) 그치만 이젠 누가 이주노동자를 차별하면 내 심신이 아프다. 내가 마음에 드는 이성이 트랜스젠더를 부정하면 내가 부정당한 듯 아프다. 어쩌면 이게 말벌 '동지'로서 연루된 자의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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