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배회하고 있다.
경제 성장이란 유령이.
2025년 현재,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다.
윤석열이 내란을 시도하고 이로 인한 경제적 타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선진국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청소년기를 보내던 2000년대 후반에도 한국이 선진국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이 있었지만, 2022년 5월 유엔 통계국이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분류하기 시작하면서 그 논쟁은 끝이 난 듯하다. 한국을 바라보는 국제 사회의 관심 역시 달라졌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외신 특파원들에 의해 실시간으로 세계 각국에 보도되고 있다.
하지만 경제 정책에 대한 국가의 관점은 여전히 1960년대에 멈춰 있는 듯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반도체 산업에 주 52시간제 적용을 제외하는 반도체특별법 제정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걸 보고 나서 이를 확실히 실감했다. 지난 20대 대선에서 주4일제를 공약으로 들고 온 정치인이, 윤석열 정부의 주 69시간 근무제에 "장시간 노동을 통해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생각은 시대착오"라고 밝힌 걸 떠올리면 엄청난 태세 전환이다.
이재명 대표가 무슨 의도로 (반도체 산업에 한해) 노동법을 개악하려는 건지, 특히 윤석열이 파면되지 않았고 여전히 행정부가 내란 특검에 협조하지 않(고 방해까지 하)는 와중에 이런 입장을 밝힌 건지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다만, 한국이란 나라에 30년 넘게 살면서 본 건 정치권이 경제 문제를 바로잡겠다고 할 때마다 늘 자본과 재벌의 편에 서서 노동자를 옥죄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반 세기만에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이 되는 한강의 기적을 경험했으니까. 자원이라고는 인력밖에 없는 한국 경제가 성장하려면 자본과 재벌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논리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개신교의 교리처럼 신앙의 영역으로 자리매김한 것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지금이 1960년대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25년 2월,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2기가 출범했고 캐나다와 멕시코, 중국에 관세 폭탄을 매겼다. 대미 무역에서 흑자를 봐온 한국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자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의 시대가 돌아온 지금, '수출로 먹고 사는' 한국 경제에 빨간불이 켜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위기를 '늘 그래왔듯이' 기업과 재벌에 힘 실어주고 노동자를 저임금-고강도로 갈아 넣는다고 극복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가 '한강의 기적'이란 기복신앙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유신으로 종신 집권을 꿈꿨던 독재자 박정희는 1979년 10월, 부하 김재규의 배신으로 암살당했다.
그러나 여전히 박정희의 경제 정책은 세기가 바뀌고 2005년생이 20세가 되고 있는 지금까지도 유령처럼 정계와 재계를 떠돌고 있다. 한강의 기적이 그리운 건지 레트로가 유행이라 자꾸 과거로 회귀하는 건지 당최 모르겠지만, 윤석열 탄핵 광장에 나온 시민들은 다음 스텝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정치권은 아직까지 20세기를 맴도는 중이다. 그들의 머릿속에 한국은 아직까지도 무역에 온 힘을 쏟아 위기를 돌파해야 할 개발 도상국인 듯하다. 때문에 한국은 경제 선진국이지만 기업과 자영업자들에게 부담 주기 싫어서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올리는데 12년을 끌었고 그 사이 물가는 14.91% 정도 올랐다.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을까?
나는 적어도 노동 이슈에 관해서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세는 나이로 고작 스물셋이었던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을 하며 남겼던 말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였다. 근로기준법을 제정하라는 것도, 개정하라는 것도 아닌 '준수하라'. 법치 국가에서 법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하지만, 법은 때때로 힘 없는 사람들에게 침묵했고 대체로 약자들을 탄압하는 근거로 쓰였다. 어떨 때 이 법치 국가는 법을 지키며 일하는 걸 문제시하기도 했다. 2024년 11월, 철도노조가 진행한 '준법 투쟁'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작업 중 뛰어다니지 않기’
‘휴게시간 지키기’
‘승객 승하차 확인 철저히 하기’
‘운전 중에도 화장실 이용하기’
이는 코레일 작업매뉴얼 안전수칙에 있는 사항을 준수하겠다는 뜻인데, 코레일은 이를 '태업'으로 프레이밍했다. 근로기준법과 안전수칙을 준수하는 게 태업이라면 우리의 산업 현장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무법 지대로 정상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무섭지 않은가? 실제로 한국은 하루에 일곱 명이 산재로 사망하는 나라다. 먹고 살려고 현장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루에 일곱 명씩 발생한다는 말이다. 청년 노동자로서 나는 구의역 김군을, 김용균, 이선호를, 장덕준을, 강태완을 기억한다. 그 외에도 내가 기억 못하는 청년들이 어디선가 먹고 살기 위해 일하러 갔다가 죽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박정희의 망령은 아직까지 산업 현장을 떠돌며 수많은 전태일들을 죽이고 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말에 나는,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설 연휴를 앞두고 중국에서 생성형 AI '딥시크'를 공개해 전세계가 깜짝 놀란 상태다.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반도체법 주52시간제를 탄력적으로 적용해야 한국에도 제2의 딥시크가 탄생한다"는 논지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정작 딥시크는 회사 내 사이드 프로젝트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트위터에 내가 '근무시간 단축된 IT 노동자들이 여가 시간에 사이드 프로젝트로 만들었다'고 했지만, 회사 업무와 무관하지 않다는 로키님의 인용 피드백이 있었다.) 그리고 이는 근무 시간과 강도에 여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로키님은 "인간의 창의성은 '딴짓'을 하며 알고 있는 것들을 연결하고 상상할 '여유'가 있을 때 가장 크게 발휘된다"고 덧붙였다. 나도 전에 코드를 만져 본 사람으로서 일이나 취업 준비에 매몰되지 않았을 때 오히려 재미있는 프로젝트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서 이 코멘트에 매우 공감했다. 하지만 딥시크로 대표되는 중국의 혁신을 부러워하기 이전에 한국은 이미 BTS로 빌보드를, 기생충으로 오스카를 점령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전적이 있는 나라다. 그리고 2024년 한글날에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세계를 뒤집어 놓은 명실상부한 아시아의 문화 강국이다. 한국인들은 저임금과 고강도 노동, 무한 경쟁이란 숨 막히는 생존 싸움을 하면서도 자국의 문화를 국제 무대에 우뚝 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 문화 강국이란 타이틀을 한때의 유행으로 끝내지 않고 지속적인 자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딴짓'할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 딴짓할 여유는 주52시간제를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적게 일하고 여가 시간을 많이 가져야 미친(positive) 창의력이 나오고 문화 강국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OECD 회원국들보다 155시간 더 일하고도 노동 생산성이 38개국 중 33위다. 그 말인즉, 재벌과 기업에 힘을 주고 노동자를 갈아넣는 식의 경제 정책이 실패하고 있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미래의 BTS와 봉준호의 앞길을 틀어막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도, 앞으로도 아무리 노동자를 쥐어짜도 한강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생각했을 때 지금 규모의 경제 성장률이 우리가 영끌할 수 있는 최대치이고, 앞으로의 과제는 이 규모를 유지하면서 내수를 진작시켜 서민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나아지게 하는 것이다. 그게 트럼프 2.0의 시대에 한국의 수출 일변도 정책이란 양날의 검을 보완해줄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아무리 정신승리를 해도 멸망한 명나라가 돌아오지 않았듯이, 재벌 총수들의 비위를 맞춰준다고 그들의 표가 민주당에 가지는 않을 걸 아직도 모르는가. 오히려 이익집단인 언론과 내란에 동조한 국민의힘, 광장의 열기에 배신당한 시민들의 분노가 모두 더불어민주당을 향할 것이다. 이미 앞에 적이 있는데 전선을 또 늘리는 건 전투에서 불리하다.
역사학자이자 작가인 심용환은 12.3 내란 사태 이후 본인의 유튜브에서 라이브로 실질적으로 사회가 변화하지 않으면 10년 안에 한국 정치 지형은 파시즘과 보나파르티즘밖에 남지 않을 거라고 주장했다. 정치적, 경제적 양극화를 막기 위해서는 결국 시민 개개인의 삶이 나아지고 있음을 체감할 수 있는 사회대개혁이 따라와야 하는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목을 틀어쥐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다. 목숨 걸고 지킨 민주주의를 자본가들에게 갖다 바칠 거라면, 민생 정책이랍시고 노동자로 살고 있는 시민들을 병들고 죽게 하는 정책을 채택할 거라면, 그날 밤 국회 담은 왜 넘은 거냐고 되묻고 싶다.
그날 밤 당신들을 계엄군의 총에서 구해준 건 병들고 죽어가는 노동자들, 차별받는 약자들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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